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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04-03 16:21
고려 왕실의 휘칭과 전주류씨 문화류씨 분파설 허구 지적
 글쓴이 : 류효신
조회 : 1,504  
고려 왕실의 휘칭과 전주류씨 문화류씨 분파설 허구 지적

1.고려왕실의 분파와 휘성 과정
이성계는 고려건국후 많은 부인들과 후실을 두었다. 혁명과정 및 권력투쟁의 과정에서
많은 반대세력 및 왕씨세력들이 희생되었고, 살아남은 사람들도 생명을 보전하기 위하여
휘칭(諱稱 =변성(變姓))을 했다. 많은 왕씨들과 명문씨족들은 화를 피하기 위하여 외가로
피신하여 어머니의 성인 외가성(外家姓=從母姓)를 취하여 그곳에 정착한 사례가 많았다.

정왕(10대,1034~1046)때 평양공(平壤公=靖簡王) 기(其)는 세 아들, 진(璡),거(거),영(瑛)과
딸 정의황후 왕씨(12대 순종왕비)를 두었다. 문종(11대: 1046~1083) 26년(1072)
왕을 폐하고 평양공을 세우려 했으나 평양공이 일찍 죽어 불발되었다. 이 사건으로
진은 남해로, 거는 안동으로 유배되었고, 영은 너무 어려서 죄를 면받았다. 그래서
영의 후손들이 고려 종실을 이어가게 된다.

평양공의 3자 영의 長子인 정(禎)은 승화후(전주)를 식읍으로 받고 숙종(15대:1095~1105)의 딸인
흥수궁주(흥수궁주) 류씨를 부인으로 맞아 두 아들을 두었다. 그러나 이미 류씨로 변성한
아들이 또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전주류씨는 신라말기에도 존재하였다는 것이며,
비록 족보는 전하지 않더라도 이미 大姓을 이루고 있었음을 가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즉 그 이전에도 고려왕실에서 분종하여 휘성하여 전주류씨가 되었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그러나 누가 종실에서 파생한 사람인지는 알지 못하는 것이다.
“고려성원록”에 의하면 평양공의 손자 정(楨)은 숙종녀 흥수궁주 류씨와 혼인하여
손자 재(梓)를 두었으나, 재는 후사(후사: 대를 잇는 아들)가 없이 딸만 두고 의종(18대:
1146~1170) 18年(1164)년에 죽었다. 

* 1030대~1160대 고려조 왕실 분파 이력 추적
평양공 王基(1072년 사망)->진(璡)
                                      거(거)
                                      영(瑛)->정(禎)->재(梓)(무후절손)(1164년 사망)
                                                  지(禔)  기(杞)

2. 문화류씨의 자기족보 주류화(主流化) 작업

건국혁명의 진행과정은 피의숙청 작업이 동반된다. 917년 고려왕조의 창건이후 480여 년간은
개성왕씨들이 득세하였지만 다른 씨족들은 쇠할 수 밖에 없었으며, 1392년 이씨조선의 개국
으로 전주이씨는 번청하였으나 개성왕씨를 비롯한 다른 씨족들은 몰락의 길을 가야 했다.
또한 다른 씨족들은 수많은 회유와 협박을 받아야 했으며, 권력투쟁과정에서 패배한 왕족들은
궁궐을 떠나 어머니의 고향에서 휘성하고 조용히 살아가야만 했던 것이다. 

족보의 정리작업은 조선왕조가 유고를 국교로 정하게 됨에 따라 재정립의 새로운 계기를 맞게
됩니다. 과거 화려한 상계와 그를 위작한 개성왕씨에 대해 자기들이 한반도 주류성씨임을 입증
하는 문하류씨 주류화 작업을 시도하게 되는데 이에 고려시대 휘성 사실을 이용한 듯 합니다.
(문화류씨들은 3산2주의 중시조 5인 전부가 문화류씨에서 분파되었다고 주장한다.)

고려왕조는 11대 문종(1046~1083)에 이르러 중앙집권적 문벌귀족사회가 정착된다. 그 후
17대 인종(1122~1146)때 에는 仁州李氏(이자연_예종의 장인, 이자겸_인종의 장인) 등 외척
세력들이 권력을 독점하고 조정을 좌지우지하였다. 1122년 예종(睿宗)이 죽자, 14세의 나이로
仁宗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이자겸은 막강한 권력을 바탕으로 十八子 도참설을
퍼트리고 권력투쟁을 계속하였고 (이자겸의 난 발생), 王弟 들을 무참히 짓밟았다. 목숨에
위협을 느낀 王弟 한분(후에 류정(柳禎))이 궁궐을 나와 승화후(全州)에 정착하면서 휘칭(諱稱)을
실시하여 柳氏姓을 사용하게 된다.(통상 휘칭은 어머니의 성을 따서 사용하였다.).
류정(柳禎)은 아들 류재(柳梓)를 두었는데 류재는 1녀만 두어 대를 잇지 못해 절손하게 된다.
문화류씨 들이 류양재의 아버지라 하는 류순(柳淳)이 대를 잇지 못한 것과 평양공의 증손인
류재(柳梓)가 대를 잇지 못한 것이 유사한 점을 이용하여 문화류씨 후손들이 자신들의
족보와 연결하는 무리한 짓을 하지 않았나 추정됩니다. 

3. 문화류씨 분파설의 오류 지적

문화류씨 들은 류순의 6남인 류양재가 전주류씨 시조이고, 류양재의 아들이 류방직, 손자가
류운, 증손이 류혼이라고 한다. 그러나  족보나 문헌에 류양재는 류순의 아들이 확실히 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柳淳은 아들 旱雲을 두었으나 旱雲은 無後絶孫함.) 또한 문화
류씨들은 류혼의 아버지가 운이고 할아버지가 방직이라 하나 이에 대한 기록이나 근거는
전혀 발견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고려 왕족이나 류씨들이 신변에 위험을 느껴 승화현(전주의 옛명칭)에 정착하면서
어머니의 성을 따라 휘성하여 류씨성을 취득하였을 가능성을 역사적 사실에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문화류씨들은 개성왕씨들에 박해 받아 왜곡된 과거의 화려했던 시조로 부터 조상에 대한 세계를
우리나라 대표적인 주류세력으로 재구성하기 위하여 과거의 사실을 배경으로 문화류씨 족보의
주류화 작업을 펼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즉 많은 내용들을 참고하여 추론해 보면 문화류씨
들은 3산 2주를 들어 자기들의 족보를 주류로 만들려고 류재(柳梓)를 류양재(柳良梓)로 간주하고
무리한 연결을 시도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류효신 13-08-21 09:19
 
궁주 (宮主): 고려 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비빈과 왕녀에게 주던 봉작. 충선왕 때 옹주(翁主)로 고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