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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8-25 16:43
전주류씨 충숙공파 중흥의 주역 류팽성과 두 아들 세화,세무.
 글쓴이 : 류효신
조회 : 1,667  
전주류씨 충숙공파 중흥의 주역 류팽성과 두 아들 세화,세무.

1. 조선전기 충숙공 후손과 柳彭成(류팽성)

 전주류씨 17세손(충숙공파) 류팽성 할아버지에 대한 연구가 별로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전주첨단과학단지 건설과 함께 류팽성 할어버지의 묘소가 이장이 이루어 지면서 많은 유물이 츨토되어 현재 연구가 진행되고 있어 세간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충숙공의 현손(=5세손=손자의 손자)인 류팽성을 포함한 충숙공 후손들은 충숙공의 유언을 받들어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말씀이 무뎌지면서 류팽성은 다른 도전을 시도한다. 류팽성은 슬하에 두명의 아들을 두어 중앙정부의 관리로 진출시켜 집안의 부흥을 도모하셨습니다.(생원 류팽성은 과거에 몇번 낙방하고 고향에서 후학들을 모아 교수하며 생을 마쳤습니다. ) 이는 충숙공이 조선의 관직에 나가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신지 100여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그래서 후손들은 이 분의 유업을 받들고 후손들의 모범으로 삼기위하여 묘소 옆에 進學齋(진학재)(후학 교습과 선조 배향이 가능한 서원 초기의 기능을 가진 건물)를 건립하여 문중과 선비들여 모여 학문을 논하고 제향하였습니다. (이것으로 추정해 보건데 진학재는 유팽성님의 호가 아니라 후학 양성과 선조 배향의 기능을 지닌 제실이라고 판단되므로 진학재 공파보다는 진학재문중으로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_현재 진학재는 전주첨단과학단지 조성으로 인하여 봉실산 서쪽입구인 봉동읍 장구리에 신축 이전 건립되어 숭조사상을 이어가고 있다.


2. 류팽성의 장남 세화, 장흥부사

柳世華(1504 ~ 1554),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全州(전주)이고, 자는 伯實(백실)이다. 생원을 지낸 柳彭成(류팽성)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妻父(처부) 는 金有極(김유극)이다. 글재주가 뛰어났으며, 詩(시)와 賦(부)에 능하였다. 1531년(중종 26) 진사에서 2등으로 합격하고, 그해 庭試文科에 갑과로 급제하여 교서관의 정자에 임명되었다가 저작을 거쳐 박사로 승진하였다. 이어 내자시주부·공조좌랑·호조좌랑 등을 지낸 후 1538년 무주현감으로 부임하여 관의 기강을 엄히 하고 백성들을 잘 돌보았으며, 향교를 개축하는 등의 치적을 쌓았다. 이어 예조정랑을 지낸 후 해운판관으로 나갔다가 돌아와 1544년 성균관직강을 거쳐 김제군수로 부임하였는데, 그 지방에 재해가 들었을 때 피해조사를 잘못하여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향리에 은거하던 중 부친상(父親喪)을 당하자 3년간 죽만 먹으며 시묘살이를 하는등 효도의 사표가 되어 조정에 보고되어 임금께서 장흥부사(長興府使)를 제수하였다. 평소 좋은 옷과 기름진 음식을 멀리 하였으며 검소를 가훈으로 삼았다. (참고:제수(除授)란 추천의 절차를 받지 않고 임금이 직접 벼슬을 내리는 일)


3. 류팽성의 차남 세무, 청송부사

柳世茂( ? ~? ), 조선전기의 문신, 본관은 全州(전주)이고 자는 子實(자실)이다. 생원 柳彭成(류팽성)의 두아들중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妻父(처부)는 安麟壽(안인수)다. 아버지가 과거시험에 거듭 낙방한 것을 거울삼아 형과 같이 학문에 진력했다. 1522(임오년) 생원시,진사시를 거쳐 명종(明宗) 7년, 1552 임자년 式年試(식년시)에 응시 乙科3위(을과3위)로 급제했다. 아버지가 병환에 오래 지속되고 있어서 서울에 머무르기가 어려워 지방관직을 원해 지방근무를 지원했으며 1579년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_종3품)를 지냈다. 공은 슬하에 자식을 두지 못해 형님 세화의 4남 류회(柳會)를 양자로 들여 대를 이어갔고 선친이나 형님의 영향으로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고 검소한 생활을 실천하였다. (柳彭成과 두 아들 세화, 세무.....柳渾(류혼)->柳崇老(류숭노)->柳子諧(류자해)->柳宗溫(류종온)->柳彭成(류팽성,->柳世華(류세화), 柳世茂(류세무))....

류효신 14-08-28 18:17
 
류세화의 호는 孝尤堂(효우당)이고, 류세무는 學諭堂(학유당)으로 조사되며, 류세무는 청송도호부사로 부임하여 활약한 내용이 기록으로 남아 있으나, 류세화는 장흥부사로 부임하여 임무를 수행했는지 등은 지방문헌 등을 통해 좀더 구체적인 확인작업이 필요하다.
류기송 14-11-06 11:10
 
조선왕조실록
명종5(1550)년 3월 18일
조사수(趙士秀)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송순(宋純)을 이조 참판으로, 이몽량(李夢亮)을 장례원 판결사로, 조광옥(趙光玉)과 송찬(宋贊)을 사헌부 장령으로, 안방경(安方慶)과 이수철(李壽鐵)을 지평으로, 류세화(柳世華)를 장흥 부사(長興府使)로 삼았다.
류기송 14-11-06 11:13
 
류세무
조선왕조실록
중종39(1544)년 9월 9일
  송(宋)나라의 부필(富弼)이 뭇 신하를 만날 때에 뜻에 맞고 안 맞는 것에 따라 기뻐하고 노여워하지 말기를 청한 일에 견준 표문(表文)을 출제하여 시험하였는데, 전교하기를, “으뜸을 차지한 유학(幼學) 박호(朴虎)는 전시(殿試)에 곧바로 나아가는 것을 허가하고, 진사 이지행(李之行), 유학(幼學) 유세무(柳世茂)는 회시(會試)에 곧바로 나아가는 것을 허가하며, 생원 박난영(朴蘭榮)과 윤흥의(尹興義), 유학 정욱(鄭彧), 진사 권신(權信)과 허엽(許曄), 생원 양응정(梁應鼎)은 1분(分)을 주라.”하였다. 신시에 상이 환궁하였다.
명종8(1553)년 3월 14일 (경인)
  임금이 조강에 나아갔다. 영경연사 심연원(沈連源)이 아뢰기를, “천우 서당(天友西堂)【일본 부사(副使)가 본국(本國)으로 돌아가다가 중도에서 죽었다.】이 죽을 때 저의 친족(親族)에게 관직을 제수하여 왕래하며 제사지낼 수 있게 하기를 청하였는데, 상께서 이미 윤허하였으니 원방(遠邦) 사람을 회유하는 방법으로는 괜찮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왜인(倭人)이 수직(受職)하는 것은 반드시 공을 세운 뒤에야 관직을 제수하는 것인데, 어찌 그가 죽을 때 요청한 말을 들어줄 수 있겠습니까.”하고,
  신광한(申光漢)이 아뢰기를, “전일 경연에서 《운부군옥(韻府群玉)》의 편찬을 계청(啓請)하여 사가 독서(賜暇讀書)하는 독서당(讀書堂)에 편찬 도감(編撰都監)을 설치하였으나, 이곳은 책을 편찬하는 곳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책을 보건대 무익(無益)한 것이 아니니 이번 한번만 하셔야 됩니다.”하고,
  대사헌 김주(金澍)가 아뢰기를, “성균 학유(成均學諭) 유세무(柳世茂)가 전주(全州) 귀신사(歸信寺) 앞에서 말을 먹이고 절에 들어가서 쉬려 하였더니, 지음승(持音僧)이 몽둥이를 든 백여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나와서 유세무의 멱살을 잡고 초립(草笠)을 찢으며 구타하려 하였습니다.
  유세무가 그 중에게 ‘너는 어찌하여 이런 곤욕을 주는가?’ 하니, 그 중은 ‘네가 문관(文官)이지만 나도 왕작(王爵)이 있다.’ 하고, 세무의 종을 구타하여 머리가 터졌다고 합니다. 신들은 이 말을 듣고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감사에게 하서(下書)하여 그 사유를 물어 각별히 치죄(治罪)하소서.”하였다.
명종8(1553)년 3월 24일 (경인)
  간원이 아뢰기를, “지금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을 다시 세운 것은 상께서 불교를 숭상해서가 아니고 중들을 통솔할 곳을 만들어 민폐를 제거하고자 함인데, 무지한 중의 무리들은 상께서 불교를 숭봉(崇奉)하는 것이라고 멋대로 생각하여 그 교만 방자한 꼴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죄인을 숨기고 사대부를 능욕(陵辱)하기까지 하니 매우 한심(寒心)한 일입니다.  요사이 불각(佛覺)이란 중이 일가족(一家族) 3명을 죽였으니, 곧 대역 부도(大逆不道)의 죄로 능지 처참(淩遲處斬)하는 율이 있습니다. 그런데 봉선사(奉先寺) 주지(住持) 수진(守眞)이 그 죄인을 숨기고 내어주지 않는 것이 경기 감사(京畿監司)의 장계에 자세히 실려 있으니 듣는 사람마다 통분해 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경기 감사로 하여금 강도 와주(强盜窩主)의 율로써 수진의 죄를 논하게 하소서.
  또 전주(全州) 귀신사(歸信寺)의 중은 학록(學錄) 유세무(柳世茂)를 능욕하여 몽둥이를 들고 유세무를 에워싸고 멱살을 잡고 뺨을 때리고 초립(草笠)을 찢기까지 하였는데, 본 고을이 추문하려고 하자 무기를 들고 서로 싸움까지 하였다 하니 매우 통분합니다. 전라도 감사로 하여금 추문하여 치죄(治罪)하게 하여 중들의 흉악한 폐단을 개혁하소서.”하니,
  답하기를, “불각(佛覺)의 일은 나도 경악하였다. 그날이 기신재(忌晨齋)라는 이유로 수진이 죄인을 잡아주지 않았다면 과연 잘못이다. 그러나 저 불각이 미리 기미를 알고 도망하였을 것이니 어찌 수진이 숨기고 내어주지 않을 이치가 있겠는가. 어리석고 용렬하여 그리한 것이니 와주율(窩主律)로써 논죄(論罪)하는 것은 불가하다.
  그리고 귀신사의 중은 이미 내수사(內需司) 로 하여금 이문(移文)하여 잡아 보내도록 하였으니 오래지 않아 잡혀올 것이다. 조사하여 그 죄가 드러나면 형조(刑曹)로 옮겨 추고해도 늦지 않다.”하였다.
  귀신사 중의 추고는 두 번 아뢰어 윤허를 받았으나, 수진의 일은 양사(兩司)가 거의 한 달 동안을 아뢰니 비로소 하옥(下獄)하라고 명하였고, 또 와주율로써 죄를 주지 않으므로 양사가 번갈아가며 율(律)대로 처벌하기를 아뢰었으나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명종8(1553)년 윤3월 2일
  학록(學錄) 유세무(柳世茂)가 상소하여 사직을 청하였으니, 중들에게 모욕을 당하였으므로 욕되이 의관(衣冠)의 대열에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상이 답하였다. “흉패(凶悖)한 중이 조정을 무시하였으니 놀랍기 그지없다. 그 중을 죄줄 것이니 사직하지 말라.”
명종8(1553)년 7월 10일
  간원이 아뢰기를, “근래에 사습(士習)이 아름답지 못하고 염치의 도가 아주 없어져 탐욕스럽고 방자함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으니 어찌 한심스럽지 않습니까. 양현고(養賢庫)는 다른 관사(官司)에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오로지 선비의 공궤(供饋)를 위하여 설립한 것이니, 관고(官庫)의 물건을 결코 사사로이 써서는 안 됩니다. 전적(典籍) 원팽수(元彭壽)와 전 학정(學正) 유세무(柳世茂)가 전에 양현고의 직장(直長)과 봉사(奉事)로 있을 때에 모든 양현고의 물건을 공공연히 나누어 가졌으며, 하인이 제시간에 물건을 가져가지 못했다고 하여 세무가 그 하인을 곤장으로 때려 죽이기까지 하였으니, 너무도 놀라운 일입니다. 금부에 내려 죄를 다스리소서.”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선조3(1570)년 7월 18일
  배천 군수(白川郡守) 유세무(柳世茂)가 을사년의 원통함을 신원하고 간흉을 토죄하라는 내용으로 소를 올렸다.
선조3(1570)년 8월 8일
  개성 유수(開城留守) 김덕룡(金德龍), 배천 군수(白川郡守) 유세무(柳世茂), 경상 감사(慶尙監司) 박대립(朴大立) 등이 모두 소를 올려 을사년의 일에 대해 신원과 토죄를 행할 것을 청하였다.
선조6(1573)년 9월 19일
  임내신(任鼐臣)을 판결사(判決事)에, 윤복(尹復)을 충청 관찰사(忠淸觀察使)에, 최희효(崔希孝)를 해주 목사(海州牧使)에, 최응룡(崔應龍)을 밀양 부사(密陽府使)에, 이언이(李彦怡)를 장흥 부사에, 유세무(柳世茂)를 순창 군수(淳昌郡守)에, 신계형(申季衡)을 진안 현감에 제수하였다.
선조6(1573)년 10월 25일
  박근원(朴謹元)을 대사간(大司諫)에, 허엽(許曄)을 대사성(大司成)에, 한호(韓灝)를 판교(判校)에, 민충원(閔忠元)을 사성(司成)에, 심충겸(沈忠謙)을 예조 좌랑(禮曹佐郞)에, 허상(許鏛)을 영릉 참봉(英陵參奉)에, 유세무(柳世茂)를 이천 부사(利川府使)에 제수하였다.
선조6(1573)년 11월 2일
한준(韓準)을 예조 좌랑(禮曹佐郞)에, 황임(黃琳)을 나주 목사(羅州牧使)에, 이인(李遴)을 의주 목사(義州牧使)에, 유세무(柳世茂)를 해주 목사(海州牧使)에 제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