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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0-15 23:04
분묘출토유물(백자묘지명)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151  
분묘출토유물(백자묘지명)

청헌 20-10-16 20:26
답변  
백자음각 류세화 묘지명(白磁陰刻 柳世華 墓誌名)

조선 1554년
높이 29.0㎝
  통훈대부 행 장흥도호부사 류세화의 백자 묘지명이다.
정언(正言)을 지낸 이승효가 1554년(명종9) 9월에 지었고 이몽란과 류용수가 글씨를 썼다.
모두 9장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여덟 번째 장은 유실된 상태다.
조상에 대한 기록을 시작으로 관직생활을 적은 후 주자가례에 의거하여 상례와 장례를 수행했던 그의 효행과 임지에서의 공덕을 높이 평가했다.
마지막에는 류세화의 짧은 생애를 애석하게 생각하며 한 편의 시로 글을 맺었다.


백자음각 류세화 묘지명(白磁陰刻 柳世華 墓誌名) 해제

통훈대부 행 장흥도호부사 유군 묘지명 전 正言(정언) 이승효가 짓다. (모두 9첩으로 되어있음)
  유군(柳君) 백실(佰實)의 이름은 세화 본관은 완산이다. 현조(玄祖) 혼(渾)은 고려시대 벼슬을 하여 전객령(典客令)이 되었다. 혼이 숭노(崇老)를 낳았는데 조선시대 들어와 임피 현령을 역임하였다. 증조의 이름은 자해(子諧)이며 조부의 이름은 종온(宗溫)인데 모두 벼슬을 하지는 않았다. 부친의 이름은 팽성(彭成)이며 기묘년에 생원에 합격하였다. 경서를 익히고 배움에 힘을 썼다.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했으나 급제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향당에서 교육에 힘써 많은 인물을 배출 하였다. 어머니 이씨의 본간은 역시 완산이다. 선원(璿源) 일방(一房)으로 완산주에 머물러 토성(土姓)이 되었다. 이궁진 이하는 모두 계보에 나온다.
  유군은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고 도량이 넓었으며 총명하고 기억력이 좋아 눈으로 본 것은 모두 다 암송하였다. 약관에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통달하였는데 특히 중용에 밝았다. 거자(擧子)로서 이름을 날려 여러 차례 고을의 천거에서 수석을 차지하였으며 동료들로부터 추앙을 받았다. 가정 신묘년(1531년 중종26년)에 진사시에 2인으로 합격하였으며 연이어 문과 병과(丙科)에 급제하였다. 처음에는 교서관(校書館)에 보임 되어 정자(正字)를 거쳐 저작과 박사에 임명 되었다. 병신년(1536년) 여름에는 내자시(內資寺) 주부가 되었다가 공조 원외랑으로 옮겨 임명 되었다. 정유년(1537년) 가을에는 호조로 옮겼다가 무술년(1538년) 봄에 무주부의 수령으로 나갔는데 그것은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서였다. 임기가 만료 되었을 때 고과 점수가 매우 좋아 예조 정랑으로 임명 되었으나 싫어하는 자가 있어서 탄핵을 받아 해운판관(海運判官)으로 좌천되었다. 갑진년(1544년) 여름에 성균관 직강으로 임명되었으나 어버이가 더욱 연로해지자 봉양을 위해 특별히 왕에게 요청하여 김제 군수가 되었다. 3년 동안 재임 하였는데 아전이 잘못을 저질러서 파면되고 말았다. 당시 조정에서는 아전의 잘못으로 수령이 파면 당하는 것은 너무 과중한 견책이므로 그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결국 왕에게 보고되어 파면되고 말았다. 정미년(1547년 명종2년) 가을에 어머니 상을 당하자 벼슬에서 물러나 복을 입었으며 상을 마친 후에는 공조 정랑에 임명 되었다. 이보다 전에 상을 잘 치른 소문이 조정에까지 널리 알려져 발탁되어 장흥부사에 임명되고 품계가 통훈대부로 승품되었다. 4년이 지난 후 장부 정리를 잘못하였다는 이유로 파면되었다. 갑인년(1554년) 봄 2월에 돌림병에 걸렸는데 병이 중해지자 사람에게 “서룡이 나타나 나를 향해 날아 왔으니 나는 곧 죽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사제인 성균관 학정 세무에게 모친 봉양을 부탁하였다. 드디어 안방에서 사망하니 겨우 50을 갓 넘은 나이였다.
내금위 김유극의 따님과 결혼하여 4남 4녀를 낳았다. 큰 아들 진 과 둘째아들 보는 모두 생원이고 셋째아들 지는 유학이며 넷째 아들 회는 나이가 아직 약관이 못되었으나 영민하고 뛰어나 사람들이 천리마라 불렀다. 장녀는 김영정에게 그리고 둘째와 셋째는 한효청과 김여건에게 시집을 갔는데 사위들은 모두 사인(士人)들이다. 막내는 아직 결혼하지 않고 집에 있다. 손자로는 약간 명이 있다.
  유군의 천성은 순박하고 독실하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와 우애하며 사람을 사귈 때에는 삼가고 후덕하게 대했다. 백성을 다스릴 때는 부지런하고 성실하였다. 항상 상사공(上舍公)을 섬김에 안색을 화평하게 하고 뜻을 잘 받들어 기쁘게 해드리려고 노력 하였다. 사재를 축적하지 않았으며 술과 고기로 부모를 봉양하였다. 상사공이 병이 나자 곁에서 간호하고 약을 직접 달이느라 밤에도 눈 한번 붙여보지 못 하였으며 손수 대소변을 받아내었다. 오랫동안 간병을 해도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위급한 처지에 이르기를 여러 차례 하였으나 모두 나으니 사람들은 “그의 정성에 감동하여 하늘이 도왔다”라고 말 하였다. 아버지 상을 당하자 매우 슬퍼하였으며 3년 동안 죽만 먹었다. 상례와 장례를 모두 주자가례에 의거하였으며 곡을 할 때에는 반드시 슬피 울고 제사 음식은 친히 올렸다. 성중에서 모친을 모시고 살 때에는 다른 사람의 집에 가서 자고 오지 않았으며 또 한밤중에 오는 일도 없었다. 영궤(靈几)에 올리는 음식을 한 번도 거른 적이 없었으며 집 밖에 나가거나 들어 올 때에는 반드시 고하고 초하루 보름에는 천신(薦新)하였다. 모친을 섬길 때에도 역시 그 정성을 다하였는데 종신토록 부모를 사모하였다.
  상사공이 막내아들을 아꼈는데 막내아들이 거처할 집이 없어서 이를 항상 걱정하였다.  상사공이 병환을 앓으면서도 오로지 이를 걱정하자 유군은 자신의 집을 양보하고 또 먹고 살 수 있도록 해주었다. 상사공의 뜻을 받들어 친족 구휼하기를 자신 돌보듯 하였다. 마음이 너그럽고 의리가 있었으며 오래도록 사람을 공경하였다.  잘 살거나 못 살거나 혹은 벼슬이 높거나 낮다고 해서 처음의 독실한 행동이 변하지 않아 모범이 되었다.
  수령이 되어 고을을 다스릴 떼에는 이름을 내려고 하지 않고 실질적으로 혜택이 백성에게 미치도록 하려고 힘썼다. 부임하는 곳마다 학교를 세워 유사(儒士)들을 장려하여 교화의 근본을 돈독히 하였다. 불법을 저지르는 토호 척결에 관심을 기울여 장흥부사로 재임 할 때 그곳의 토호와 교활한 아전을 탄압하자 그들이 드러내놓고 유감을 나타냈으며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유군을 욕보이려고  하였다.  그런데 마침 큰 흉년이 들었는데 고을의 재정이 넉넉하여 굶주린 백성들을 모두 살리니 비방소리가 자연히 사라졌다.
  아아 온전한 재능과 덕을 갖추었으나 관직은 겨우 3품에 머물렀으며 고을은 겨우 두 읍 밖에 다스리지 못했으니 아쉬움을 금할 수가 없다.

(8첩 유실로 내용 미상)

숨겨지거나 희미하게 잊혀진 사실을 밝히는 것이 우리와 같은 사람들의 책임이다. 다만 믿을만한 자료도 없고 증거 될 만한 자료도 없음을 염려하여 이에 유군 생애의 큰 줄거리를 주워서 기록하고  명을 짓는다.

50여세 살았으니 요절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인자함을 생각하면 단명한 것이며
3품의 벼슬이 비록 높은 것이나 
그의 덕을 생각하면 오히려 소략한 것이네.
오래 살고 풍요를 누리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난 알 수 없네.
이 사람을 다른 사람들과 동일하게 여겨 아무런 감정도 없다면
오직 재물자(宰物者)의 탄식 소리만 느네

가정 33년 갑인 9월 일 (1554년 명종 9년 )

(6첩의 뒷면)
가정 33년 갑인 7월 17일에 묘지명을 쓰기 시작하여 다음 날인 18일에 마쳤다.
서사(書寫) 이몽란(李夢蘭) 유용수(柳龍壽)
상인(喪人) 유회(柳會)